<첫 단추, 창세기> 창1:1
새 해를 맞으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부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전체를 한 주에 한 권씩 쉽게 풀어서 설교를 해 보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엄청난 긴장과 집중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성경 66권 각 권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인물들과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짧은 30-40분에 요약해서 전달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입니다. 자칫 겉만 핧다가 말 수도 있고, 아주 지극히 작은 부분 하나만 건드리고는 끝날 수 있는 그런
작업입니다.
아무래도 이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해 왔던 설교의 틀을 먼저 깨야 할 것 같습니다. 짧은 본문 안에서만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책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메시지를 찾으려고 애 쓸 것이고, 더 나아가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라는 큰 틀 안에서 성경 각 권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 삶의 기초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삶의 모든 이야기가 다 성경 이야기 안에서라야 정확하고 바르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톰 라이트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목적은 세상 전체에 대한 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
이 말은 진리입니다. 성경은 우리 세상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기본 이야기를 제공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서 창세기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다
잘 아시다시피 창세기는 시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는 시작,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던지, 소설책을 읽던지 처음 장면을 놓치면 그 전체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이 전체 성경의 시작부분이라면, 창세기는 이 시작에서도 가장 앞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놓치면 성경의 다른 부분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가
다 이 창세기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는 어떤 대상을 향해 처음 쓰여졌을까요?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시간상으로는 출애굽 사건보다 앞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시내 광야에 이르기 전까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조상에게 하신 일들에 대해서 입을 통해 전수되었을 것은 분명하지만
점점 희미해져 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던 그들이 애굽에 내려진 재앙을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출애굽을 하고, 홍해 앞에서 자신들이 구출되고 애굽 군대가 물 속에 갇혀 버리는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자연히 이런 질문들이 생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애굽의 바로를 패배시킬 수 있었을까?”, “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 대해 주장한 권리는 무엇일까?”, “이 하나님이 왜 우리들을 구원하셨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창조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창세기를 구조적인
면에서 본다면, 열 번에 걸쳐 사용된 도입 어구 “톨레도트”(히브리어로 ‘족보”, “기원”을 뜻하는)라는 말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하늘과 땅에 관한 톨레도트(유래, 기원, 족보), 아담에 관한 톨레도트, 노아에 관한 톨레도트..등
이런 “톨레도트”들과 그 가운데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뽑아 확대시킨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책이 창세기인 것입니다.
창세기는 또한 내용적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번째 부분은 1-11장으로 이 부분은 세상과 전체인류의 기원에 대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창조 이야기,
아담 이야기, 가인과 아벨 이야기, 노아 홍수
이야기, 노아의 세 아들과 그 후손 이야기등이 있습니다. 두 분째 부분은12-50장으로 이 부분은 전체 인류의 이야기 대신 하나님이 자신의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택하신 한 특별한 가족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까지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전체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 포인트, main idea들은 무엇일까요? 세 가지를
말씀 드릴려고 합니다. 특별히 오늘이 새 해 첫 주일이기 때문에 “첫
단추를 잘 끼우자”라는 의미에서 첫단추와 연결시켜 말씀 드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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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의 첫 단추를 바로 꿰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역의 주요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 창조하신 세계 전체를 통치하시는 것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것이 바로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모세가 썼습니다.
당시 주변 나라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물의 신, 불의 신, 태양의 신, 달의 신, 동물의 신, 그래서 그런지 모세는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만드시는 장면을 묘사할 때,
창세기 1장16절에서 해를 가리켜 “큰 광명체”, 달을
가리켜 “작은 광명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당시 이스라엘 자손이 살던 지역의 사람들은 해와 달을 신으로 숭배한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성경은 해를
피조물로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광명체’에 불과한 것은 경배를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신이시며, 그 분만이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예)
이번 1월 1일에 한국 뉴스를 보니20만의 사람들이 해를 보러 떠났다. 해를 보며 소원을 빈다. 어떻게 보면 코메디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때 성경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정확하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첫 장을 읽는 것을 이렇게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훌륭한 전시회에 들어서서 위대한 미술작품의 아름다움과 힘에 압도되어 조용히
어느 한 사람이 앉아있다. 그 때 누군가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화가를
만나 보시겠어요?” 창세기 1장은 그 예술가에 대한 서론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은 피조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분이 만드신 것에 이름을 붙이십니다.(예: 낮과 밤, 하늘과 땅, 해,달, 별, 바다,
사람). 이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주권의 표현입니다. 이름을 짓는 행위는 무엇보다 주권의 표현입니다. 이름을 주는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통치권,지휘권, 소유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예) 자녀의 이름을
부모에게 지어 달라고 하는 것은 존경과 예의를 갖추는 것이 된다. 성경적인 이름을 목사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는 것도 권위를 존중하는 데에서 나오는 모습이다.
이렇게
창세기 초반에는 하나님이 세상만물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시는 창조주로 등장하십니다. 그 분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면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마치
자녀가 태어나기 전, 아기가 태어날 모든 준비를 마쳐놓고 기다리는 부모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할렐루야!!
이 질서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임을 알려주는 경계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서를 깨뜨리고자 하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그는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 질서를 깨뜨릴 것을 충동질합니다. 뱀이 하와에게 속삭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니라” 이 말은 하나님의 선언에 대한 반역이고 도전입니다.
이런 반역과 도전이 노아홍수 시대에 그리고 바벨탑 사건에서
다시금 반복 됩니다. 특히나 바벨탑에서 교만해 진 인간들은 하늘에까지 높아지기를 시도합니다.
이 싸움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새 해에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며 인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통해 삼하5:10을 말씀 드렸습니다.
창1:26의 말씀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역할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강력한 왕들이 자신이 직접 가지 못하는 제국의 지역들에
자신의 지배권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형상을 새긴 동상을 세우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이 땅에 존재합니다. 인간은 이 땅에 하나님의 명성이 높아지도록 창조 세계를 잘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는 존재입니다. 청지기로 잘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반영하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일할 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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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첫 단추를 바로 꿰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셨던 것은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관계를 파괴하는 근본요소에는 “권위에의 부정”, 즉 “불순종”이라는 요소가 있습니다. 창3장에는 바로 타락사건이 등장하는데
이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불순종이었습니다.
어릴때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담배 피우지 말라는 선교사님의 충고에 한 고등학생이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사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이 담배도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왜 못피게 하는 겁니까?”
어릴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도 만들고, 낙태도 만들고, 자살도
만들고, 마약도 만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침입해 들어온 “불청객”입니다. 창세기는 죄를 창조의 영역에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반응과 관계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스스로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시도였습니다. 니므롯의 등장을
보십시요.(창10:8) 니므롯의 아내는 아들 담무스를 남신으로,
자신을 여신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남신과 여신의 기원이 됩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는 이 비극적인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은 그 분의 창조세계와 그 분의 나라를 향한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언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신의 계획을 펼쳐 나가실 때,
자기 백성과 맺으시는 특별한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286회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멸망하도록 놔두시지 않았습니다. 창3:15의 첫 언약을 선언하십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 지어 입히시고(창3:21), 아벨이 죽었으나 후손이 끊기지 않도록 셋을 낳게 하시고, 노아를 살려 주시고, 셈을 통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노아에게는
“노아 언약”(창9:1, 8-17, 8:21),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인류전체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언약에 신실성을 보여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불임, 아브라함과 사라의
조작 그리고 심지어 아브라함과 사라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 약속을 성취하시고야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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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저주의 첫 단추를 바로 꿰어야 합니다.
창세기에는 죄로부터 비롯된
타락을 뚫고 지나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움직임을 기록합니다.
창세기3장 15절은 하나님의 선전포고입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서로 적대하는 두 세력, 곧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빛의 나라와 어두움의 나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세상에서 전투를 벌입니다.
이 후에 나오는 모세,여호수아, 엘리야 모두
하나님과 우상, 사망과 생명 사이에서 선택을 할 것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촉구합니다.
순종하는 사람과 불순종하는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싸움은 도처에서 나타나며, 전투에서 자유로운
그 어떤 중립지대나 삶의 영역도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셋을 택하십니다.
셋의 후예 중 노아를 택하십니다.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을 택하십니다.
셈의 후손 중 아브라함을 택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차별이라고 하나님을 공격할 지 모르나, 이것은 인간의 자기위치를 모르는 오만에서 나온 말입니다. 자신이 구속의 은혜를 베풀 대상을 선정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영역인 것입니다.
축복이라는
단어는 ,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려는 목적을 나타냅니다. 반면 저주라는 단어는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에 반대하여 나아갈때 피조물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12장1-3에서 ‘축복’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창세기1-11장에서 ‘저주’라는 단어가 다섯 번 나온 것과 대조를
이루며 우리에게 아주 선명하게 무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창조세계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역전시키기 위해 일하시겠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저주를 가져왔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사용하셔서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12:2-3의 이 마지막 구절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타락의 결과에 대한 답변이며,
세상을 구속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청사진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2-3)
창세기
이야기의 끝 부분에 이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즉 그의 후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이 부분적으로 성취됩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 첫단추를 잘 꿰어야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이 디자인하신대로 복있는 삶이 되겠구나” 하는 교훈을 얻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장소에 있든 하나님 앞에 선 여러분에게 질서가 있는 것처럼 질서의 첫단추를 잘 꿰시길 축원합니다. 교만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의 자리를 지키십시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믿음의 백성답게 살아 가십시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믿음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믿음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전수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저주받은
문화가 지배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반기를 들고 거역하는 이 시대, 또다시 바벨탑을 쌓으며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아지려는 이 타락한 시대 가운데에서 도도히 흐르는 믿음의 물줄기를 타고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잘 도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